***지난 수요일 2009년 02월 03일 일기 우중충한 날, 무거운 마음으로 온천장 CGV에서 한국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보았다. 관람 도중 객석에서는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나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내내 숙연한 마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제작 솜씨와 특별한 배경음악 없이 처리한 영상미가 돋 보였다. 그 감동이 아직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여기에 관련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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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이충렬 "10만돌파, 농담같아" |
"마지막 승부수, 관객과 통했네요" |
독립 영화로는 최초로 관객 10만 명을 돌파한 '워낭소리'의 이충렬(42) 감독은 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대박' 소식이 "농담같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배급사 인디스토리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 감독은 "마지막 승부수라고 생각하고 '워낭소리'를 만들었는데 다행히 관객들이 많이 관람했다. 관객들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 같아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워낭소리'가 동원한 관객수 10만명은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에서는 기념비적인 숫자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통틀어 이전까지 1편의 독립영화가 동원한 가장 많은 관객은 2007년 개봉한 '우리학교'(김명준)의 5만5천명(공동체 상영 제외)이었다. 지난달 15일 개봉한 '워낭소리'는 일찌감치 '우리 학교'의 기록을 넘어서더니 개봉 19일만인 2일 관객수 10만명을 돌파하며 독립영화의 지평을 넓혔다. 방송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독립 프로덕션 일을 하던 그가 '워낭소리'를 마지막 승부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정신적,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때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촬영은 해놨지만 방송국에서 퇴짜 맞은 다큐멘터리 테이프들이 방에 쌓여갔고 벌이가 없으니 무일푼이 된 겁니다. 잠도 안오고 속도 울렁거리고 공황 장애 수준까지 갔죠. 그런 상황에서 '워낭소리'를 찍기 시작한 겁니다. '제대로 승부를 걸어보자'고 큰 결심을 하고 촬영을 시작한 것이죠." 이 감독이 처음 아버지와 소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떠올린 것은 1999년 IMF 시절이었다. 우울한 시대에 아버지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하고 나니 떠오른 것은 항상 소와 함께 했던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제가 시골(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소와 연결이 되더라고요. 제 기억 속에 아버지 옆에는 항상 소가 있었거든요. 워낭소리는 제게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주는 주술 같은 느낌이었죠." 나이든 소와 나이든 할아버지를 수소문한 끝에 영화 속 할아버지를 찾게 된 감독은 2년의 긴 시간 할아버지와 소, 할머니 곁에 머무른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결국 극장에서 상영이 됐지만 '워낭소리'는 원래는 방송용으로 기획됐다. TV가 아닌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된 것은 방송국이 '워낭소리'에 대해 퇴짜를 놨던 '덕분'이었다. "자신있게 방송국에 갔더니 돌아오는 게 '소 얘기가 뭐가 재미있겠느냐. 의미는 좀 있겠다'는 식의 반응인 거예요. 게다가 방송국에서 줄 수 있는 돈도 제작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요. 고민하던 중 영화 배급사(인디스토리)를 만나게 된 것이죠." 7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워낭소리'는 호의적인 입소문이 퍼지더니 상영관이 38개까지 늘어났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고 그 덕에 영화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제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의 스타가 됐다. "어제 봉화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 세배하고 돌아왔다"는 이 감독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유명세에 큰 부담을 느끼고 계신 것 같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 감독은 "사진기자나 방송국 카메라 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할아버지의 집에 자꾸 찾아와서 할아버지가 언짢아하시더라"며 "할아버지는 일하시는 걸 방해받기 싫어하신다. 영화의 인기가 그분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아직은 감독보다는 PD라는 호칭에 더 익숙하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차기작 계획에 대해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TV 방송을 염두에 둘지, 극장 상영을 고려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다큐멘터리도 재미있네'라는 생각이 들 만큼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 '워낭소리'처럼 이성적인 쪽보다는 감성적이면서 내면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 ||
최종편집 : 2009-02-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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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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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 문화부장
늙은 소와 촌로는 닮았다. 힘겨워 보이는 걸음걸이와 세월의 무게에 쇠잔해진 몸뚱이가 그렇다. 자식들과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늙은 소를 팔겠다고 우시장으로 향하던 날, 큰 눈망울로 굵은 눈물을 떨구며 마지막 만찬(?)을 거부하는 소의 모습은 짠하다.
우시장에서 촌로는 늙은 소를 거액인 500만원이 아니면 안 팔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늙은 소는 추운 겨우내 나뭇짐을 잔뜩 실어 날랐다. 땔감이 담 아래 켜켜이 쟁여가던 어느 날 소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간다. 소는 온 힘을 다해 촌부를 바라본다. 마지막 눈빛 인사라도 나누듯이. 그제야 촌로는 소의 코뚜레를 풀어준다. 소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좋은 데로 가래이…”라고 말하는 촌부도 목이 멘다. 처연함을 넘어 삶과 죽음을 성찰케 해준다.
경제불황에 용산 참사,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등 세상이 어수선하다. 위기의 시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해준다. 3년간 제작비 1억원을 들여 만든 영화 ‘워낭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다.
고장 난 라디오를 두드리는 촌로를 향해 “할배도 소도, 라디오도 이제 다 고물”이라고 환하게 웃는 아낙의 모습에선 삶의 달관마저 느껴진다. 삶의 동반자였던 촌로와 소는 각박한 세태에 사람 간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늙은 소와 촌로가 무거운 나뭇짐을 각기 나눠지고 싣고 함께 걷는 장면이 압권으로 꼽히는 이유다. 함께 나눈다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실직 대란의 시기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덕목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워낭소리’가 아닐까.
미국 태생의 노벨상 수상 작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 펄 벅(1892∼1973)이 자신의 소설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를 집필하기 위해 1960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펄벅은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했다. 그는 왜 한국인을 그렇게까지 칭송한 걸까. 경주 일대 등을 둘러보던 펄 벅의 눈에 들어온 것은 농촌의 가을걷이 풍경이었다.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자신도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다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마음 씀씀이에 반했던 것이다.
영화 ‘워낭소리’는 바로 그런 한국인의 심성을 고스란히 일깨워 주고 있다. 나눠 지는 동행의 미학이 돋보인다. 앞만 보고 질주했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청아한 워낭소리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시작된 작금의 세계경제 위기는 인간의 무한 욕망의 결과물일 수 있다. 이제라도 삶의 패러다임을 바꿔 질주의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의 출발은 ‘삶의 원형’를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영화 ‘워낭소리’는 소와 촌로를 통해 살아가고 일하고 늙어가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 모든 존재의 삶의 원형을 보여준다. 혹시라도 소가 먹을까 농약을 쓰지 않고 소의 무거운 짐을 나눠지는 촌로의 마음, 쇠잔한 다리를 끌며 땔감을 옮기는 소의 마음, 한평생 신세 한탄을 하면서도 지아비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는 아낙의 마음은 비록 사소한 것 같지만 펄 벅이 그랬듯이 위대함으로 다가온다.
소는 촌부에게 워낭을 선물로 남기고 떠났다. 세월과 삶의 고단함에 헤지고 파인 손아귀엔 워낭이 쥐여졌다. 시대의 절망과 고통을 나누라는 이즈음의 ‘당위’처럼.
- 편완식 문화부장
- 기사입력 2009.02.03 (화) 20:59, 최종수정 2009.02.03 (화)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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